오자서
중국 춘추시대 오나라의 정치가로 자서(子胥)는 자이며, 이름은 오원(伍員)이다.
오자서의 부친 오사는 초 평왕의 태자 스승으로, 평왕과 태자의 사이가 나빠지고, 태자가 폐위되면서, 오사와 장남 오상은 평왕에 살해됐다. 홀로 남은 오자서는 복수를 맹세하고, 태자와 함께 정나라로 탈출한다. 정나라로 간 태자는 진나라의 부추김으로 반역을 하려고 했지만, 역으로 정 정공에게 살해된다. 오자서는 태자의 아들과 함께 이번에는 오나라로 도망했다. 오나라로 간 오자서는 오나라 왕의 종친 광(光)을 섬겼다. 광은 원래 왕이 되었어야 되는 사람이었는데, 이복 동생 요에게 왕위를 빼았긴 사실을 알고 광의 쿠데타 때에도 협력하여, 광은 즉위를 해서 오왕 합려가 된다.
손무와 함께 합려를 보좌하여 강대국으로 만든 뒤, 기원전 506년에 초나라에 병사를 일으켜, 그 수도를 함락시켰다. 평왕은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오자서는 묘를 파헤치고 평왕의 시체를 300번이나 채찍질하여 원한을 풀었다. 사기의 오자서열전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예전의 친구였던, 신포서는 너무 가혹하다고 비난했지만, 오자서는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도리를 역행할 수밖에 없다.(吾日莫途遠,吾故倒行而逆施之。)”고 하였다고 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사자성어 일모도원(日暮途遠)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후, 강대해진 오나라는 패권 야욕으로, 월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월왕 구천의 참모 범려와 지혜 대결에서 패하고, 오군은 월나라에 대패하게 된다. 이 때의 상처로 합려는 사망하게 된다.
합려 사후 왕위를 계승한 오나라 왕 부차는 복수를 결심하고 혹여 그것을 잊을까 두려워 섶(臥薪) 위에 누워 잠을 청하며,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복수의 칼날을 간다. 기원전 494년 오나라의 복수를 두려워한 구천은 오나라를 미리 침략한다. 범려의 만류를 묵살하고 월왕 구천은 출병하였지만 그 싸움에서 대패한다. 월왕 구천은 범려의 의견에 따라 부차에게 머리를 조아려서 신하를 자처하고, 부인을 오왕의 첩으로 바친다는 굴욕적인 강화를 청했다. 월왕 구천의 강화 제안에 오자서는 구천을 죽일 것을 강력하게 주창하지만, 북쪽으로의 영토 확장을 꿈꾸던 오왕 부차는 간신 백비의 말에 따라 월나라를 속국으로 삼는 것으로 끝을 냈다.
강화 체결 후 월왕 구천은 부차의 종이 되어 생활했다.
3년간의 종살이를 끝내고 기원전 491년 월나라로 돌아온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받은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쓸개 맛(嘗膽)을 보며 범려와 문종에게 도움을 받으며 복수의 칼을 갈며 인내했다.
범려(范蠡)와 문종(文種)은 부차의 측근인 재상 백비(伯嚭)에게 뇌물을 계속 보내어 부차와 오자서를 이간하게끔 유도하고, 서시(西施 고대 중국의 4대 미녀(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중 한사람)를 보내 오왕 부차가 정사에 소홀해지도록 하는 한편, 해마다 조공을 받쳐 월나라에 대한 경계를 늦추도록 했다.
그 후도 부차는 북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국력을 급속하게 소모하고 있었다. 오자서는 “제나라가 피부병이라면 월나라는 속병이니, 패권주의를 접고 내실을 다지시라”라고 진언하지만, 부차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재상 백비는 성실하고 정직한 오자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다양한 수단으로 부차와 오자서를 이간질한다.
이 상태로는 언젠가 월나라에 화를 입을 수 있다고 판단한 오자서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아들을 제나라에 맡겼다. 그러나 스스로는 오를 버리지 않겠다고 돌아오고, 이 일이 본국에 돌아온 후에 알려져 문제가 되고, 오자서는 부차로부터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때, 오자서는 목숨을 끊으며 자신의 무덤가에 가래나무를 심어 그것으로 오왕 부차의 관을 만들고, 자신의 눈을 빼내 오나라 동쪽 관문에 걸어 오나라 멸망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말에 격노한 부차는 오자서를 가죽 자루에 넣어 강물에 버리지만,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근처에 사당을 지어주었다. 오자서가 죽고 월나라를 경계하는 자가 없어지자 오는 파멸의 길로 나가게 된다.
기원전 482년, 제나라를 정복한 오왕 부차는 진나라, 노나라 등의 제후국을 불러 회맹하기 위해 송나라 땅 황지(黃池)로 향했다. 이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월왕 구천이 군사 5만을 이끌고 오왕 부차의 귀로를 차단하고, 오나라 수도를 공격했다. 월왕 구천은 이내 오나라 수도를 함락한 뒤 태자를 죽였다. 이 소식이 황지에 있던 오왕 부차에게 바로 전달되자, 오왕 부차는 화의를 신청했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 주력 부대가 복귀할 경우 싸워 이긴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강화를 받아들여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4년 후, 오나라의 국력이 급격히 쇠퇴한 것을 간파한 월왕 구천은 다시 군대를 동원해 오나라를 공격했다. 기원전 473년, 드디어 양산에서 오왕 부차를 포위했다. 그는 오왕 부차를 불쌍히 여겨 항복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범려가 회계의 일을 상기시키며 반대했다. 이에 오왕 부차는 자결을 결심하고, 과거 오자서의 조언을 무시한 것을 한탄하며 칼을 들었다.
사후 1000년 뒤인 당나라 때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다.
오자서는 격정의 사람이다. 그 몇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격정으로 다대한 공적을 올렸다. 그러나 그 격정 때문에 최후는 주군과 대립해 소외당하고 자살에 이르렀다. 한편, 범려는 냉정하게 시류를 읽는이나 월을 떠나, 최후는 제나라에서 부호가 되었다고 한다.
조조는 관도 대전 때 자군에게 내려온 장합들을 마중나갈 때에 오자서의 최후를 인용해, 「오자서는 시중드는 군주를 오인한 일을 깨닫는 것이 늦었다. 너히가 나에게 항복한 것은 미자계가 은나라를 배반해 주를 시중들고, 한신이 항우의 아래를 떠나 유방을 시중든 것과 같은 정당한 행동이다」라고 해 편장군으로 임명해, 도정후에 봉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건은 중상모략에 떨어져 오사에 이르렀다. 상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했으나 오원은 달아나 오에 갔다.」라고 열전의 6권에 「오자서 열전」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日莫途遠
오자서(伍子胥)와 신포서(申包胥)는 친구였다. 오자서가 초(楚)나라를 떠나 오(吳)나라로 도망갈 때, 신포서에게 말했다.
我必覆楚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망하게 하고 말 것이다.
我必存之 이에 신포서가 답했다.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지키겠네.
오자서는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인 '영'으로 쳐들어와 아버지와 형을 죽인 소왕(昭王)을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이에 오자서는 소왕의 아버지인 평왕(平王)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채찍으로 300대나 친 다음에야 멈췄다. 신포서는 도망쳐 나와 산속에서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오자서에게 말을 전했다.
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인중자승천 천정역능파) 세력이 흥성할 때는 천리(天理)도 거스를 수 있지만, 천리는 결국 그 세력을 무너뜨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대는 전에 신하로서 평왕을 모셨는데 지금 그대가 이미 죽은 왕을 심하게 욕보이다니, 이 어찌 극악무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자서가 말했다.
吾日莫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오일모도원 오고도행이역시지) 내 나이가 들어 마치 갈 길은 먼데 해가 지는 것처럼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렇게 천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