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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한국

수운(水雲) 최재우(崔濟愚)

by 큰나루tv 2024. 1. 4.

水雲 崔濟愚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아버지는 최옥(崔鋈)이며, 호는 근암(近庵)이고,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7대조 진립(震立)은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여 사후에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를 받았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가문 출신이다.

 

근암은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한 유생으로 17세에 결혼 했으나 아들은 죽고 부인도 20여 년 동안 병석에 누어있다 세상을 떠났다.

상처 후 3년이 지나야 결혼할 수 있었으나 자식이 없었으므로 1년 후에 다시 결혼했다.

그러나 재혼 후 2명의 딸을 낳고 부인이 죽었다.

 

근암은 2번 상처를 하고 과부이던 한씨를 만나 63세에 최제우를 낳았으나 이미 동생의 아들 제환(濟寏)을 양자로 들인 후였다.

 

수운은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는데 수많은 책을 읽어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10세 때에는 이미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혼인했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농사에는 마음이 없었으며 살던 집이 화재로 소실되어 집안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3년 상을 마친 뒤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면서 활쏘기와 말 타기 등을 익히고,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1855년(철종 6) 3월 최제우는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다가 나이 30세를 전후하여 처자와 만나 울산으로 이주하여 속유곡동이라는 곳에 초가집을 한 채 마련하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58년(乙卯) 어느 봄날 최제우가 방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낯선 승려가 찾아와 “저는 금강산에서 온 중인데 뜻한 바가 있어서 백일 동안 치성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치성을 끝내는 날 탑 위에 이상한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얼른 펴보니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책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해석할 사람을 찾아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연히 선생님을 뵙고 느낀 바가 있어 이 책을 올리겠습니다. 부디 이 책의 뜻을 풀어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최제우가 그 책을 받아 펴보니 과연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이상한 책이었다. 그는 사흘 뒤에 오면 그 뜻을 풀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사흘 뒤에 과연 그 승려가 다시 찾아왔다. 최제우는 사흘 동안 연구한 그 책의 뜻을 잘 풀어 주었다.

그러자 그 승려는 매우 기뻐하면서 “선생님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분입니다. 부디 자중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말을 마치고 돌아서자마자 간 곳이 없었다. 또한 돌이켜 보니 그 책도 간 곳이 없었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승려로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하기 전에 경험하였다고 전해지는 신비체험과 관련된 책)를 얻고 난 후 더욱 수련에 힘써 1856년 양산군(梁山郡) 천성산(千聖山)의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가 죽어 47일 만에 기도를 중단했으며 다음해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 기도를 드렸다.

 

이후에도 울산 집에서 계속 공덕을 닦았으며, 1859년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온 뒤에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을 계속했다. 이 무렵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구미용담 찾아드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수는 의구하고

초록은 함정(含情)이니

 

불효한 이내마음

그 아니 슬플소냐

 

오작(烏鵲)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듯고

송백은 울울하여

정절(貞節)을 지켜내니

 

불효한 이내마음

비감회심 절로난다

 

☞득도의 길에 오르면서 읊은 용담가.

 

1860년 4월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공중으로부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사람들에게 포교할 준비를 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여러 가지 소문도 떠돌게 되고 지방의 유림과 친척 중에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서학(西學:천주교)을 신봉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하여 이듬해 3월 경주로 돌아갈 때까지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해 있었다. 피신 중에 자신의 도가 서학으로 지목되는 것을 반성하고 표현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으며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해 〈논학문 論學文〉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안심가 安心歌〉·〈교훈가 敎訓歌〉·〈도수사 道修詞〉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제자 중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전도에 힘쓰게 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1862년 9월 이술(異術)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최제우의 가르침이 민속(民俗)을 해치지 않는다고 증언하면서 석방해줄 것을 청원하여 경주진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무죄로 석방했다.

 

이후 그는 신도들에게 세상의 오해를 받기 쉬운 언행을 삼가 하도록 경계했다. 한편 그가 무죄 석방되자 사람들은 관이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해 포교가 더욱 용이해졌다. 신도가 늘어나자 그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접은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설치되었으며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道號)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그해 11월 왕명을 받은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3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효수형(梟首刑)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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