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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중국

가의(賈誼)

by 큰나루tv 2024. 1. 2.

가의(賈誼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68년)는 전한(前漢)의 정치가이자 문인이다.

봉건제도(封建制度)는 건국의 공을 세운 종실들에 영토를 나누어주는 권력분산제도다.

최초로 하나의 중국으로 통일한 진시황은 봉건제도를 폐기하고 ‘군현(郡縣)제도’를 시행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진이 종실을 울타리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 망했다고 생각했기에 친족과 공신들을 분봉 제후로 삼았지만, 점차 제후들의 군사력이 커감에 따라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 대안으로 제후들의 병력 약화와 재정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해 제후들의 영토 사이에 황제 직할의 군현을 설치하고,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종실의 역량을 강화했다.

그러나 종실출신의 제후들이 권력이 커지자,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사태가 계속 이어졌다.

이 문제를 풀고 싶었지만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있어 누구하나 감히 거론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뜨거운 감자 같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그가 가의다.

 

젊은 천재 가의는 ‘천하가 평안하려면, 봉지를 나누어 제후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종실에게 정치적 경제적인 우대를 해주는 것은 좋지만, 권력을 주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주장을 펴는 가의를 당연이 제후와 대신들은 곱게 보지 않았다.

황제가 그를 공경의 반열에 올리려고 하자, 주발(周勃)과 관영(灌嬰)을 비롯한 군인출신 노 대신들은 ‘어리고 배운 것도 없는 자가 권력을 휘두르며 매사에 분란을 일으킨다’고 반대했다.

 

가의는 전한 초기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정치가였다.

비판자들은 상업도시로 유명한 낙양에서 태어난 그를 ‘장돌뱅이’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는 천하의 정세를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정제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씨(呂氏)를 물리치고 재집권한 문제는 그가 제시한 원대한 개혁안을 받아들였다.

가의의 건국대강(建國大綱)은 역대 중국왕조의 기본적인 구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유가가 바탕이었지만, 이사(李斯)의 제자였던 오공(吳公)의 영향을 받아 법가적 요소가 강했다.

오공은 18세에 ‘시’와 ‘서’에 통달한 가의를 불러 제자로 삼았다.

정위(廷尉)로 임명된 오공의 추천을 받아 최연소 박사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약관 20세였다.

1년 후 문제는 가의를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하고, 그의 건의에 따라 제도개혁에 착수했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과진론(過秦論)’은 가의가 불과 20대 초반에 쓴 글이다. 

 

나이가 어리고 더구나 총명하기까지 한데다가 한 발 더 나가 개혁적인 인물이라면 당연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될 것이며, 또한 기득권을 유지하고픈 보수파에게는 눈에 가시거리였을 것이다.

결국, 반발에 부딪친 문제는 그를 장사왕(長沙王)의 태부로 좌천시켰다.

굴원(屈原)이 멱라(汨羅)에 투신하여 죽은 지 100여 년, 한(漢) 나라의 가의(賈誼 BC200~BC168)가 좌천되어 부임하러 가는 도중, 상수(湘水)를 건너다 자신도 굴원(屈原)과 같이 참소(讒訴)를 당해 좌천 되었다는 생각으로 감회에 젖어 굴원(屈原)을 조의(弔意)한 글이 조굴원부(弔屈原賦)이다.

 

조굴원부(弔屈原賦)/가의(賈誼)

황공하옵게 높으신 은혜를 입어 장사(長沙)에서 죄를 기다리던 중 어렴풋이 듣건데 굴원선생이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졌다고 하네.

상강에 이르러 흐르는 물결에 내 뜻을 붙여 경건히 선생을 애도하네.

세상의 무도함을 만나 망극하여 기어이 몸을 던져 운명했으니, 아아 슬프도다! 때를 만남이 상서(祥瑞)롭지 못함이여 난새와 봉황새는 엎드려 숨어있고 솔개와 올빼미는 드높게 날개 치네.

용열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높이 드러나서 참소(讒訴)하고 아첨(阿諂)으로 뜻을 얻었네.

현인과 성인은 거꾸로 끌려 다니고 단정하고 바른 사람은 거꾸로 세워졌네.

변수(卞隨)와 백이(伯夷)를 부정하다 하고 도척(盜(跖)과 장교(莊蹻)를 첨렴하다고 하며 막야(莫邪) 명검(名劍)을 무디다고 하고, 납으로 만든 칼을 날카롭다 하네.

아, 뜻을 얻지 못하고 묵묵히 선생은 까닭 없이 화(禍)를 당함이여! 주(周)나라 금 솥을 굴려서 버리고 큰 진흙 표주박을 보배라고 하며 지친 소에게 멍에를 매어 끌게 하고, 절름발이 노새를 곁말로 알며 준마(駿馬)는 두 귀를 늘어뜨리고 소금 수레를 끄네.

장보(章甫)라는 관(冠)은 신발 밑에 깔아 점검 오래 견딜 수 없으리니 아! 슬프다. 선생이여! 홀로 이 고난을 겪었네.

꾸짖으며 말하기를 ‘다 그만두리라! 나라에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 하나도 없구나.’라고 하셨으니 나는 홀로 불평과 울분을 그 누구에게 말하겠소.

봉황이 훨훨 날아감이여! 그것은 진실로 스스로 끌어서 멀리 가는 것이네.

깊은 못에 몸을 사리고 있는 신용(神龍)은 깊이 못에 잠겨 스스로 몸을 보중(保重)하려 함이라.

교달벌레 피하여 숨어 삶이여! 어찌 두꺼비나 거머리 지렁이를 따르랴? 귀하게 여기는 바는 성인(聖人)의 신성한 덕이라.

혼탁한 세상을 멀리하여 스스로 감추었네.

기린(麒麟)을 고삐 매어 굴레를 씌운다면 어찌 저 개나 염소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도리어 어지러운 세상에서 이런 허물을 만났으니 또한 선생의 잘못이었네.

구주(九州)를 두루 돌아 그 임금을 섬겼어야 할 것을 하필 이 초(楚)나라도성(都城)만을 마음에 두셨소.

봉황(鳳凰)은 천 길 높이 날면서 성군(聖君)의 덕의 빛을 보면 내려오고 덕이 없는 험악(險惡)한 조짐이 보이면 아득히 멀리 더욱 날개치며 가버리오.

저 작고 더러운 웅덩이 속이 어찌 배를 살킬 큰 물고기를 용납(容納)할 수 있으리오.

강과 호수에 비껴 놀던 전어와 고래도 진실로 장차 땅강아지와 개미에 눌리게 되리라.

 

다산 정약용 선생은 자신의 처지와 비슷했던 가의를 생각하며 시를 남겼다.

 

장사적객가선생(長沙謫客賈先生)

화려하고 찬란한 그 문장/ 덕망은 높은데 영험한 관찰력/

뛰어난 식견으로/ 형태 없는 것까지 면밀히 보았네/

은나라 주나라의 아름다운 정치에/ 요순의 법과 제도를 펼쳐서/

진의 잔재도 소탕할 능력에/ 기개까지 뱃속에 가득 찼건만/

세상은 결코 믿어주지 않아서/ 천년토록 눈감고 계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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